새벽에 온천탕 들어갔다가 식겁한 썰
예전에 일본 갔을 때 있었던 일임.
친구랑 둘이 간 여행이었고, 지방 쪽 작은 온천 료칸에서 하루 묵었음.
엄청 유명한 데는 아니고, 역에서 버스 한 번 더 타고 들어가는 곳이었음.
료칸 자체는 괜찮았음.
오래되긴 했는데 더럽진 않았고, 직원들도 친절했음.
문제는 대욕장이었음.
체크인할 때 직원이 설명해줬는데, 남탕 여탕이 시간대마다 바뀐다고 했음.
이건 일본 료칸에서 가끔 있는 거라더라.
아침이랑 밤에 탕 위치가 바뀌는 식으로.
나는 그런 거 잘 몰라서 친구가 “노렌 색깔만 잘 보면 됨” 이랬음.
파란색이면 남탕, 빨간색이면 여탕 이런 식으로.
그날 저녁에는 사람도 좀 있고 그래서 그냥 대충 씻고 나왔음.
탕은 좋았음.
노천탕도 있었고, 바깥으로 산이 보였음.
근데 새벽에 한 번 더 들어가고 싶더라.
여행 가면 그런 거 있잖아.
괜히 돈 아까워서라도 한 번 더 이용해야 할 것 같은 거.
새벽 4시 좀 넘었을 거임.
친구는 자고 있었고, 나는 혼자 수건 들고 내려감.
복도에 아무도 없었음.
료칸 복도 특유의 카펫 밟는 소리 있잖아.
발소리는 나는데 너무 작아서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거.
대욕장 앞에 갔는데 파란 노렌이 걸려 있었음.
그래서 그냥 들어갔음.
탈의실도 비어 있었음.
바구니 몇 개 있고, 체중계 있고, 벽에 선풍기 달려 있고.
거울 앞에는 드라이기 두 개가 놓여 있었음.
나는 옷 벗고 대충 몸 씻고 탕으로 들어갔음.
안에는 아무도 없었음.
탕 물소리만 계속 났음.
물이 넘쳐서 바닥으로 흘러가는 소리.
처음엔 좋았음.
새벽에 혼자 온천 들어가니까 괜히 여행 온 느낌도 나고.
근데 한 5분쯤 지나니까 이상하게 뒤쪽이 신경 쓰였음.
대욕탕 안쪽에 샤워 자리들이 쭉 있었는데, 거기 거울들이 다 김이 서려 있었거든.
그중 하나에 사람 윤곽 같은 게 보였음.
처음엔 내가 비친 줄 알았음.
근데 위치가 이상했음.
나는 탕 안에 앉아 있었고, 그 거울은 내 오른쪽 뒤였음.
각도가 안 맞았음.
그래도 김 때문에 그렇게 보이나 싶어서 그냥 안 보려고 했음.
근데 물소리가 하나 더 들렸음.
탕 물 넘치는 소리 말고, 샤워기 물 떨어지는 소리.
뚝뚝, 이런 게 아니라
누가 낮게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졸졸 나오는 소리.
나는 그때까지도 누가 들어왔나 보다 했음.
새벽에 나 같은 사람 또 있을 수 있잖아.
그래서 일부러 뒤를 안 봤음.
괜히 민망하니까.
근데 이상한 게, 사람이 들어왔으면 탈의실 문 열리는 소리나 발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음.
그리고 샤워 소리가 나는 쪽에서 아무 움직임이 없었음.
그냥 물만 나옴.
그 상태로 몇 분 있다가 더 못 있겠어서 일어났음.
탕에서 나와서 샤워 자리 쪽으로 가는데, 진짜 한 칸만 물이 틀어져 있었음.
내가 아까 씻은 자리 아니었음.
샤워 의자도 앞으로 살짝 빠져 있었고, 바가지가 뒤집혀 있었음.
근데 사람은 없었음.
여기서부터 좀 급해짐.
나는 물 잠그고 바로 나가려고 했음.
근데 수도꼭지 잠그려고 손을 뻗는 순간, 거울에 뭐가 보였음.
내 뒤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음.
진짜 선명한 건 아니고, 김 낀 거울에 검은 머리랑 어깨 정도만.
여자처럼 머리가 길었음.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음.
여기가 남탕인데?
아니, 새벽에 탕 바뀌었나?
내가 노렌을 잘못 봤나?
이 생각이 먼저 들더라.
귀신보다 그게 먼저였음.
내가 여탕 들어온 거면 진짜 큰일이니까.
그래서 뒤를 바로 못 돌아봤음.
거울만 보고 있었는데, 그 검은 윤곽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였음.
그때 샤워기 물이 갑자기 세게 나옴.
진짜 누가 손잡이를 확 돌린 것처럼.
나는 그냥 뛰어나왔음.
수건도 제대로 못 두르고 탈의실로 나왔는데,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음.
내 바구니 말고는 비어 있었고, 바닥도 말라 있었음.
근데 이상한 건 탈의실 거울 앞에 드라이기 하나가 켜져 있었음.
소리는 안 났음.
바람도 안 나왔음.
근데 전원 스위치가 올라가 있었음.
아까 들어올 때는 분명히 꺼져 있었거든.
나는 그거 끄지도 못하고 옷만 입고 나왔음.
대욕장 입구로 나오는데, 노렌을 다시 봤음.
빨간색이었음.
진짜 빨간색.
내가 들어갈 때는 파란색이었다고 확신했는데, 나올 때는 빨간색이었음.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음.
내가 처음부터 잘못 본 건가?
중간에 직원이 바꾼 건가?
아니면 새벽 4시에 남탕 여탕이 바뀌는 시간이었나?
방에 올라와서 친구 깨웠음.
친구가 비몽사몽으로 듣더니 대욕장 교체 시간 확인해보자고 하더라.
안내 종이에 적혀 있었음.
교체 시간은 오전 5시.
내가 내려간 건 4시 넘어서였고, 방에 돌아온 건 4시 30분쯤이었음.
아직 바뀔 시간이 아니었음.
그럼 노렌이 왜 빨간색이었냐고 했더니 친구가 그냥 내가 잘못 본 거 아니냐고 함.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음.
근데 다음날 아침에 체크아웃할 때 직원한테 대욕장 혹시 새벽에 누가 청소했냐고 물어봤음.
직원이 아니라고 했음.
청소는 5시에 탕 교체하면서 한다고.
그러면서 직원이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했음.
“새벽에는 혼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일본어를 친구가 대충 통역해줬는데, 그런 뜻이었음.
왜냐고 물어보니까 직원이 웃으면서 말 안 함.
그냥 산 쪽이라 바닥이 미끄럽고 위험하다고만 했음.
그 말도 맞지.
온천탕에서 미끄러지면 위험하니까.
근데 나는 그 뒤로 새벽 온천 안 감.
노천탕이 아무리 좋아도, 새벽에 아무도 없는 대욕장은 안 들어감.
김 낀 거울도 잘 안 봄.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지,
내가 노렌 색을 잘못 본 건지,
샤워기 물이 원래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음.
근데 하나는 기억남.
그 거울에 비친 머리카락.
내 뒤에 서 있던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뛰어나올 때까지 바닥에 발소리는 한 번도 안 났음.